조회 : 4110     날짜 : 2009-10-28
제목 : 2009.03.13(금) 중앙일보-week&어디로 숨었나, 피맛골 그 맛집
원문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528852

피맛골 맛집 술래잡기

서울의 대표적인 먹자골목인 종로통 뒷골목 피맛골이 사라져가고 있다.

조선시대, 대로변을 질주하는 양반님네들의 말과 마차를 피해 서민들이 걸어다니던 뒷골목. 이곳은 어느새 서민을 위한 먹자골목이 되었고, 일제시대를 거쳐 20세기 말까지도 주머니 가벼운 서민의 허기와 치기를 달래주는 대표적인 공간이 돼줬다. 해장국골목·낙지골목·주점골목 등 골목마다 서민 먹거리를 앞세운 식당들이 북적거렸고,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뒷사람과 등을 비비며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들로 골목은 불야성을 이뤘다.

이 골목이 금세기 들어 시작된 재개발로 허리가 뭉텅 잘렸고,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길도 이젠 재개발 순서를 기다리는 신세다. 주점과 맛집들은 대부분 간판을 내렸고, 밤이 되면 을씨년스러운 적막감이 허리가 끊긴 골목길을 따라 흐른다.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식당도 활기가 떨어진 건 매한가지다.

30년째 이 골목에서 생선을 구워 팔고 있는 대림식당 주인 석송자(66)씨는 “연기 때문에 처음부터 길에서 생선을 구워 왔는데, 한때는 사람에 치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많던 가게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사람의 발길도 많이 끊겼네요”라고 말했다.

맛집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소설가·시인·화가·언론인 등의 아지트로 인기를 누렸던 시인통신, 주당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던 부산뽈데기 등 적잖은 터줏대감들이 피맛골을 완전히 떠났다. 부산복집·함흥집·남도식당·대성양곱창·삼성집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맛집들도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맛집이 피맛골 주변을 기웃거리며 이 부근 어디론가 스며들어 가고 있다. 더러는 최근 피맛골 허리 부분에 완공한 오피스텔 빌딩으로 스며들었다. 또 더러는 종로·북창동·사직동 등 길 건너 저편으로 새 둥지를 찾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재개발로 어수선한 피맛골 안에 아직 화덕에 불을 끄지 않은 대폿집도 있다. 건물이 팔리지 않아 고집스레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잊지 않고 찾는 단골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교보빌딩 뒤에 남은 작은 주점들의 불이 꺼지면 피맛골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이 골목을 그리워하게 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여기저기 흩어져 꼭꼭 숨어버린 피맛골의 맛집들을 술래잡기 하듯 찾아내 옛 정취를 한번 달래보는 정도인지 모른다.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그리움 때문일까, 그리 멀리 못 갔네

지금 피맛골 일대는 썰렁하다. 밤을 환히 밝히던 맛집과 주점은 몇몇 곳만 남았을 뿐 모두 떠났다. 그래도 수십 년을 한결같은 맛으로 피맛골을 지켰던 터줏대감 중 일부는 이곳저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이들 피맛골 터줏대감을 찾으러 나섰다. 수소문을 거듭해 소재를 찾아낸 20여 곳이 여기에 있다.


썰렁해진 골목을 지키는 터줏대감들이다. 일부는 세들어 있는 건물이 팔리지 않았고, 일부는 아직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여전히 썰렁해진 골목에서 문을 열고 장사를 한다.

열차집 대표적인 피맛골 터줏대감 격인 막걸리집. 황학천이 복개되기 전인 59년 천변에 나무 의자를 늘어놓고 시작했다. 6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우제은(68)씨가 77년부터 32년째 뒤를 잇고 있다. 메뉴는 한결같이 빈대떡에 막걸리다. 간을 하지 않은 빈대떡에 굴젓을 곁들여 먹는 맛이 일품이다. 빈대떡(9000원) 등 메뉴는 10년째 같은 가격이다. 02-734-2849.

대림식당 삼치·굴비·꽁치 등을 구워 파는 생선구이 전문 식당. 30년째 쉬는 날이 없다. 가격도 모든 메뉴가 6000원, 10년 전 그대로다. 아직 이전 계획이 없다. 02-739-0829.

원조 할머니 낙지쎈타 낙지볶음의 원조 박무순(92) 할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다. 무교동 낙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실비집을 접었다가 7년 만인 2000년 둘째 아들 이중택(62)씨와 다시 시작했다. 낙지를 볶을 때 고춧가루·마늘·생강 등 처음에 사용했던 재료만을 고집해 45년째 맛이 한결같다. 메뉴는 낙지볶음(1만6000원)·조개탕(1만원)·감자탕(9000원)·파전(8000원) 등이다. 02-734-1226.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죽을 때까지 손에서 낙지 안 놓을 거야”
낙지볶음의 살아있는 전설, 92세 박무순 할머니


 “그땐 매운 양념에 버무린 낙지는 상상도 못했지.”

박무순(92·사진) 할머니는 소위 ‘무교동 낙지’로 불리는 낙지볶음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무교동 낙지를 탄생시켰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집이 많지만 박 할머니 앞에만 서면 이내 꼬리를 내린다. 대부분 그에게서 손맛을 배우거나 모방했던 탓이다.

무교동 낙지는 1965년 탄생했다. 장소는 서울 서린동 한국수출보험공사 자리다. 한 대폿집을 인수한 박 할머니가 내놓은 신메뉴가 낙지볶음이다. “낙지가 쌌고, 흔했던 시절이야. 그런데 이를 당시엔 데치거나 국 끓여 먹는 게 전부였지. 그래서 평소 집에 온 손님에게 술안주로 내놨던 것을 선보이기로 했지.”

박 할머니는 상호를 실비집으로 바꿨다. 메뉴는 매콤한 낙지볶음과 이에 어울리는 담백한 조개탕, 그리고 감자탕과 파전이 전부였다. 손님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대박이 터진 것이다. 낙지볶음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주전자가 전부였던 시절이었지만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 안 돼 유정·미정 등 유명한 낙지집이 생겨났다. 서린동 일대에 열 곳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박 할머니는 인근에 낙지센타(72년)를 열었다. 소위 분점이었다.

무교동에도 낙지골목이 형성됐다. 당시 손님 대부분은 무교동 오피스타운의 넥타이부대였고, 이들이 서린동과 무교동의 낙지볶음을 ‘무교동 낙지’라 부르면서, 이것이 지금까지 고유명사처럼 이어져오고 있다.

70년대 중반 서린동이 재개발되면서 박 할머니는 청진동으로 옮겨 실비집만 운영했다. 그러다 93년 큰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가면서 가게를 이강순(71) 할머니에게 넘겼다가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와 둘째 아들 이중택(62)씨와 함께 청진동에 ‘원조할머니 낙지센타’를 다시 열었다.

박 할머니의 낙지볶음은 세월이 흘러도 맛이 한결같다. 몇 백원 하던 낙지볶음이 1만6000원, 주전자에 담아 냈던 막걸리가 소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구순의 박 할머니는 예전에 비하면 거동은 많이 불편해 카운터에 앉아 손님을 맞는 일을 주로 하지만 매일 음식 상태를 점검하는 건 잊지 않는다.

“낙지는 국산이 거의 나지 않는 탓에 중국산을 쓰지. 중국 칭다오에서 큰아들이 최상의 낙지만을 구매해 냉동 상태로 보내주고 있어. 조리법도 마찬가지야. 청양고추와 일반고추를 반반 섞은 고춧가루에 마늘·생강, 설탕 조금 넣는 것뿐이야. 아무리 바빠도 미리 볶아놓는 것도 없지.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지금도 주 메뉴는 낙지볶음과 조개탕(1만원)·감자탕(1만원)·파전(8000원) 등 45년 전 그대로다. 박 할머니는 요즘도 하루에 낙지를 한 접시씩 먹을 만큼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보람 있지. 죽을 때까지 낙지를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피맛골 옛날엔 … 딱 한잔만~ 600년 서민 쉼터

 조선시대, 서민들은 양반들을 실어 나르던 교자와 가마를 보면 무조건 엎드려 예를 표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던 일이 지체되거나 하급 관료들이 출근 시간을 놓치는 등 폐단이 많았다. 특히 종로통이 그랬다. 이 같은 불편을 덜기 위해 서민들이 양반을 만나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도록 대로를 따라 좁은 길을 만들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흥인문까지 종로를 따라 양쪽으로 생긴 좁은 골목이 바로 피맛길이다.

당시 길의 폭은 3.43m(11척)였다. 이는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공전편’의 도로 정비 규정에 따른 것이다. 태종 15년(1415년) 도로를 정비하면서 대로는 폭 17.48m(56척), 중로는 5m(16척), 소로는 3.42m(11척)로 정했다. 피맛길은 그런 작은 길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피맛길에 서민이 많이 다니다 보니 목로주점·모주집·장국밥집 등이 자연스럽게 들어섰고, 이게 20세기 말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다 이젠 도심 재개발을 맞아 약 600년 만에 사라지게 된 것.

현재 남은 피맛길은 종로를 기준으로 북쪽으론 교보빌딩 뒤에서 제일은행 본점 사이, 서울YMCA에서 인사동 입구 사이, 탑골공원에서 단성사 사이 등이다. 남쪽에도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중 북쪽 피맛길은 2002년 종로구의 새 주소 부여 사업 시행에 따라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단성사까지를 동피맛길, 서울YMCA까지를 서피맛길, 그리고 제일은행 본점에서 교보빌딩까지를 피맛길로 나눠 부르고 있다. 흔히 피맛골이라 부르는 구간은 교보빌딩에서 인사동 입구 사이다.

박상언 기자